최규하 그리고 신현확


최규하의 영전에 바칠 꽃은 없다

그에게 '무덤까지 안고갈 비밀'은 애초부터 없었다

긴박하게 전개되는 한반도의 핵 위기 속에서도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고가 만만치 않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론은 그의 남다른 인생역정과 관련하여 '불행한 시대의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수사를 붙여주었지만,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수사일 뿐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관운이 트인 사람은 여러 명이 있었지만, 나는 그처럼 운이 좋은 사람을 알지 못한다.

우리 주변에는 총리와 민선과 관선 서울시장을 두루 역임한 고건씨나 최장수 총리를 역임한 정일권씨, 박정희 정권의 2인자에서 국민의정부 2인자로 변신해 총리를 역임한 김종필씨 등 화려한 관운을 자랑하는 인물이 여러 명 있지만 누구도 최규하씨의 관운을 넘지 못한다.



그렇게 관운 좋은 사람이 비운의 대통령?

그는 유능한 외교 각료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무총리에 오르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하필이면 운이 좋게도 그가 대통령직 승계서열 1위인 총리로 재직할 당시 박 대통령이 살해당함으로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은 국민투표·쿠데타 등 방법의 옳고그름을 떠나 각고의 노력 끝에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그는 아무런 노력 없이 대통령에 올랐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한 일이라고는 한 독재자의 신임을 받은 것뿐이었다.

이같은 비난에 대해서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고 87세의 고령으로 사망한 고인에게 너무 지나친 비난이 아니냐'는 반박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이승만 치하에서 외교부 차관을 지냈고, 5·16군사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회의 의장 박정희'의 외교담당 고문을 역임했으며, 유신독재의 총리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에 대한 동정의 여지는 사라진다.

그는 박정희의 군부 쿠데타를 처음부터 종말까지 함께 한 인물이었다.


2003년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최규하 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그는 군사독재의 공범이다

12·12 쿠데타와 5·18학살과 관련한 그의 침묵은 여러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했지만, 당시 사회가 그에게 물었어야 할 책임의 요지는 "그가 이 두 사건의 공범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또한 "12월 8일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날 전두환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을 알았다"는 그의 발언만 놓고 보더라도 '국가의 안위와 헌정질서를 수호할 책임'을 가진 대통령 대행으로서 직무를 유기한 혐의가 드러난다.

청문회 증언거부와 검찰 수사에서의 묵비권 행사 등 그의 침묵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희생자 내지는 피해자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반민족 반민주 정권의 핵심 용의자(容疑者)로서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한 것이다.

지난 25년간 그의 침묵과 운둔은 그가 비운의 삶을 산 불행한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권력의 모든 단맛을 만끽한 노회한 정객이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안락한 노후를 즐기기 위한 귀거래사(歸去來辭)였을 뿐이다.



그가 걱정한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많은 의문을 자신의 가슴 속에 묻고 간다고 믿겠지만 역사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역사는 늘 약삭빠른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인간의 그러한 비겁함까지도 이용하며 역사가 발전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인이 된 최규하씨에게 '무덤까지 안고 갈 비밀'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그가 평생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하지만 그가 걱정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알량한 명예'였음을 알만한 사람은 누구나 안다.

이것이 내가 그의 영전에 꽃을 바칠 수 없는 이유이다.
(2006.10.23 오마이뉴스)

신현확 전 국무총리
최규하 전 대통령이 얼마 전 사망했다. 그리고 그를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만든 운명의 10월 26일 국민장으로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작년 가을 MBC주말 드라마 <제5공화국>이 한창일 무렵 나는 <작은책>에 박정희 권력의 중핵인 만주 인맥의 대표 최규하를 이야기한 바 있다. 그자의 죽음을 보면서 일제가 세운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 관리가 독립된 대한민국의 대통령까지 오른 최규하의 성공담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비극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한편 언론에서는 짧았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자가 혹시 남겼을지 모르는 비망록이 있다 없다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1979년 10·26에서부터 그해 12·12 반란 그리고 이듬해 5·18 학살과 8월 장충체육관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그자가 신군부에게 모욕당한 기록 말이다. 만약 최규하가 남겨 놓은 비망록이 존재하고 또 그것을 유족들이 일반에 온전히 공개한다면 고인이 된 최규하 자신에게는 모욕일지는 몰라도 후세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사료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시절 그자의 우유부단함으로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당한 것을 생각할 때 유족들은 비망록을 공개해 조금이나마 역사 앞에 속죄하기를 바란다.

갑자기 찾아온 10·26은 최규하를 대통령 권한대행에 이어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고 당시 부총리였던 신현확을 국무총리로 만들어 주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 안에서 자기 세력을 키우고 있던 신군부는 박정희의 갑작스런 사망을 계기로 유신 철폐 같은 국민적 민주화 열망이 뜨거워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간다. 이것의 시작이 바로 12·12 군사 반란이다. 12·12 이후 최규하는 이름뿐인 대통령이었으나 반대로 신현확은 신군부와 호흡을 척척 맞추며 정부 내 강경 기류를 이끌어 나간다. 즉 짧은 국무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자는 당시 공화당 의원들, 특히 김종필조차도 당시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 김대중과 대화하며 여야 합의로 헌법을 개정해 정국을 운영하려 했음에도 헌법 개정은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민들을 더욱 자극한다. 이 때문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계엄 해제와 ‘신현확 전두환 퇴진’과 ‘유신 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위기를 느낀 신군부는 급기야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 같은 정적을 제거하기로 하고 광주를 그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5월 학살 직후 신현확은 국무총리에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유신 독재에 이어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을 내용으로 하는 5공 헌법을 만드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1920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신동이라 불렸다는 신현확은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를 졸업하고 1943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오늘의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일본의 관료로 진출하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오늘의 행정고시)에 합격해 조선인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상무성에서 근무한다. 해방 당시 그자의 직책은 군수성 군수 관리관으로 전쟁에 한창이던 일본 처지에서 매우 중요한 부서에 신현확을 앉혔다는 것은 일제가 그자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한마디로 말해 준다.

해방 후 대구대학(청구대학과 합병한 지금의 영남대) 교수로 있던 신현확을 정계로 부른 자는 같은 칠곡 출신으로 갑부의 아들이며 미군정 아래서 수도경찰청장으로 지낸 장택상이었다. 특히 장택상의 아버지인 장승원은 일제 당시 친일 부호로, 독립운동가 박상진 열사에게 살해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이승만이 신뢰하는 장택상의 추천으로 부흥부 장관까지 승승장구하던 그자는 4·19에 이어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3·15 부정선거 연루 혐의로 2년 넘게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아마도 그자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자 마지막 시련이다. 그 뒤 역시 고향에서 가까운 달성 출신인 김성곤(쌍용그룹 설립자)과 함께 쌍용양회 사장, 역시 김성곤이 이사장으로 있던 국민대학 이사장을 지내며 주로 경제 분야에서 일해 오다가 1972년 유신 체제와 함께 공화당 국회의원과 보건사회부 장관, 부총리까지 고속 승진을 해 나가며 10·26을 맞는다. 이런 신현확이 80년 봄 당시 국민 요구와는 정반대로 유신 체제를 찬양하고 나선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자의 변신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김종필과 공화당 의원들이 대부분 신군부에 정치 규제를 당하는 숙청 속에서도 자신을 재빨리 공화당을 떠나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얼굴마담 격인 국정자문위원으로, 다시 삼성물산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강원도 원주 출신인 최규하가 대구 경북 출신들이 주축이 된 신군부에 심한 모욕을 당한 반면 신현확은 상대적으로 ‘TK 마피아의 대부’라는 별칭을 들으며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해 온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체제와 똑같이 대구 경북 지역과 군인이라는 출신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신군부에 같은 대구경북 출신 민간인을 연결해 주는 막후 실력자로서 신현확의 존재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느껴졌다.

심지어 김영삼 정부를 지나 지역주의라는 늪을 도저히 건너지 못하 고 있던 김대중은 마침내 동진 정책이라고 하여 대구 경북의 정서에 감성으로 호소하는 구애 작전을 벌이면서 마침내 박정희기념관 건립이라는 무리수까지 범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김대중은 대통령 신분으로 대구를 찾아가 - 더 정확히 말하면 신현확을 찾아가 -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약속하는 항복 선언을 하며 지역주의를 인정하고 만다. 몰론 김대중 정부의 동진 정책은 아무런 성과 없이 민주화세력의 비난만을 초래했을 뿐이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한다고 만든 신현확이 회장으로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는 현 정부 들어서도 정부를 상대로 기념관 건립 지원금을 내놓으라며 소송 중에 있으니 동진 정책은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신현확의 막후 구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2004년에는 대부분 독재 정권에 부역한 자칭 원로들이 모여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우려하는 시국 선언에 자기 이름을 올리더니 요즘에는 박근혜의 대선 캠프에 원로 자문 그룹으로 활동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민족의 아픈 역사와 마주하지 않고 어느 정권에든 부역을 일삼아 온 신현확에게 2000년, 서울대 법대 동창회는 자랑스러운 서울 법대인 상을 줌으로써 스스로 상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말았다. 더욱 걱정스런 것은 최규하만큼이나 80년 당시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그자마저 아무런 역사의 증언과 발언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현재 정부 고위 관료인 자신의 외아들에게는 현직 공무원 가운데 최고 재산가(2005년 현재 186억 원 보유)라는 유산을 물려주었음에도 80년 광주의 원혼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이 사라진다면 두고두고 후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7.8 작은책.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대한민국 경제ㆍ정치사의 큰별이 졌다. 26일 향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에는 신 전 총리의 별세를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인에게는 언제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관료,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1920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신 전 총리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1943년 경성제대 재학 시절 고문시험 행정과에 합격하면서 일본 상무성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고인의 일생은 대한민국 정부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광복 후 대구대 교수로 3년간 외도했지만, 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다시 공직자로 돌아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그의 업무 능력을 인정했다. 고인이 국장 시절 경무대로 호출받아 당시 이 대통령에게 직접 세부적인 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신 전 총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은 그를 `천생 경제관료`라고 말한다. 1959년 만 39세의 젊은 나이에 현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이듬해 4ㆍ19혁명 직후 `3ㆍ15 부정선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2년여 간 옥고를 치렀다. 관계에 복귀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름에 따라 75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였다.


1978년에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올랐다. 탁월한 경제 식견과 업무 조율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모범적인 경제관료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고인이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그 이유를 대라"며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고인은 10ㆍ26 이후 5공화국이 출범하기까지 6개월간 내각 수반인 국무총리를 지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고인은 최규하 전 대통령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개헌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1995년 검찰의 12ㆍ12 수사과정에서 고인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중정부장직 겸직을 반대하는 등 신군부의 무리한 요구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다시 한번 정부 각료다운 강직함을 보여줬다. 엄상익 변호사는 고인의 이 같은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블로그에 고인을 `맑고 공정한 노인`이었다고 기억했다. 정계에서도 고인을 기억하는 목소리가 많다. 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고인에게는 `대쪽`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한 의원은 고인에 대해 "공화당 의원이었지만 정부가 잘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의원이었다.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발벗고 나설 각오가 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재계에서의 발자취도 적지 않다. 4ㆍ19혁명 직후 국무위원 일괄사퇴로 부흥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고인은 동해전력 쌍용양회 쌍용산업 사장 등을 지냈다. 1986년 삼성물산 회장으로 임명돼 `이건희 회장 체제`의 기반을 닦았고, 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기업윤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지금은 외아들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이 `한국 민주화 과도기`에 총리를 지냈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가며 국무조정실을 지키고 있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격동기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제1공화국 탄생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기까지 정·관·재계를 두루 거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관료출신으로 승승장구했던 그는 경제 개발과 군부독재의 중심에 서서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TK(대구·경북)의 대부’로 최근까지 정·관계 인사와 교류를 계속하며 녹슬지 않은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20년 경북 칠곡에서 출생한 고인은 일찍이 경북·대구 지역에서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현 서울 법대)를 졸업한 후인 194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현 행정고시)에 합격해 일본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조선인 합격자로서는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해방 후 대구대학(현 영남대) 교수로 있던 그는 51년 당시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의 부름으로 관직에 복귀,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에 임용됐다. 59년에는 만 39세의 나이로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오르는 등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는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3·15 부정선거 연루 혐의로 2년 넘게 옥살이를 하는 고초를 맛봤다. 출감 후에는 관계 대신 재계로 눈을 돌려 동해전력·쌍용산업 사장 등을 역임했다. 73년 공화당 국회의원(군위·성주·칠곡·선산)으로 당선되면서부터 박정희 정권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박대통령의 눈에 띄어 75년 보건사회부 장관직을 맡게 됐고, 78년에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기용됐다. 그가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게 된 계기는 10·26이었다. 경제부총리로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장시간 입씨름한 끝에 박대통령의 사망사실을 확인했고 통합병원으로 쫓아가 시신을 직접 확인한 일화는 유명하다. 1979년 박대통령 서거 이후 6개월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고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80년엔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5공화국 헌법을 주도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보다도 적극적으로 개헌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해 언급하면서 여론의 관심 대상이 됐다. 이 때문에 그가 ‘신군부와 야합했다’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려 한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그는 5·17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의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이튿날 총리직 사의를 밝히고 물러난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도 가까웠던 그는 86년 삼성물산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그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다. 당시 ‘이건희 회장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엔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기업윤리위원장으로 선임되는 등 말년까지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했다.

by 럭키 | 2007/11/02 10:26 | old days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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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못난인간 at 2007/11/22 15:03
각고의 노력으로도 못하는 통령을 최규하님은 해냈으니 과연 최고관운이라 하겟군요.ㅎㅎ
신총리는 정말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이겠습니다,ㅎㅎ
Commented by 못난놈 중하나 at 2008/12/23 14:58
친일파는 어자피죽어야해 잘죽엇다 ㅆ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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