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사람들

大邱사람들

大邱에 내려와 生活한지 1年 6個月 남짓. 서울에서 20年 넘게 살다와 다시 올라온 大邱는 서울에서 공공연히 膾炙되던 ‘고담大邱’라는 汚名이 설마하며 믿고 싶지 않았지만, 豫想보다 훨씬 더 問題가 많은 都市라는 걸 알게 되었다.

新聞을 펼쳐들고 읽어봐도 가슴 답답한 題目과 記事만 눈에 들어온다. 社說인지 칼럼을 읽어보면 그저 豫算을 적게 配定 받았느니, 新空港을 密陽에 幼稚해야하는데 자칫 釜山에 빼앗길 것 같다느니, 尖端醫療複合團地가 忠北 五松보다 벌써부터 實績이 低潮하느니, 大邱市가 地域業體에 廣告를 안주고 忽待를 하고 있다며 징징대거나 온통 中央政府에 대한 怨望과 自責으로 一貫하고 있다.

볼 일을 보기위해 집을 나서 車를 몰고 裏面道路를 달려보면 道路周邊에 不法駐車된 車들로 엄청날 정도다. 4車線 道路에 양 가장자리의 2개 車線은 아예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大邱는 自轉車를 利用하기에 가장 的當하지 않은 都市인 것만은 分明하다. 人道를 떡하니 가로막고 세워둔 不法駐車 車輛들, 人道를 占據한 隣近 가게나 店鋪 등에서 내놓은 物件이나 突出看板으로 自轉車를 몰고 갈 엄두가 나자않는다. 특히 機械附屬商이나 自動車整備 등 店鋪商街는 아예 人道를 자신들의 陳列臺나 作業場으로 使用하고 있는 것이다. 大邱에는 과연 行政力이나 警察力이 存在하는가 疑問이 들 정도다. 市民들의 意識, 公務員들의 꾸준한 行政指導나 警察들의 嚴正한 團束으로 首都 서울과 比較한다는 것이 좀 그렇다고는 하자만 大邱가 發展을 하려면 意識부터 바꿔야 한다.

大邱 距離를 걷노라면 茂盛한 所聞의 發源地인 大邱의 沈滯된 모습을 곳곳서 볼 수 있다. 有一하게 東城路 거리에서만 젊은이들이 내뿜는 活氣를 發見해 낼 수 있었지만, 예전의 活氣와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眞正한 젊음의 覇氣, 活力의 氣運을 본 게 아니라, 地方都市에 殘存한 몇 남지 않은 남은 靑年들의 흐릿한 眼光이었다.

온 都市 구석구석에 澎湃해있는 敗北主義의 두터운 帳幕. 그것이 經濟的 亂國 狀況에 直面해 있는 것에서 大部分 根源을 찾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의식, 精神의 改造, 革命的 改善이 아니면 걷어낼 수 없는 굴레가 될 것이 分明하다는 것을 感知했다.

法規를 함부로 無視하고, 國家行政力을 拒否하고, 地緣主義的인 舊態的 思考方式, 먹고사는 일에 汎濫하는 超法的 逸脫行爲 등 이러한 一連의 固着된 意識을 脫皮하지 않으면 안된다.

特別히 指摘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먼저 道路周邊에 함부로 駐車해놓는 行爲부터 고쳐야 한다. 잠시 볼일을 보기위한 駐車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대개 不法駐車 車輛 運轉者는 누구나 볼 일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잡아떼는 것이 市民意識의 問題다.

人道는 말 그대로 步行者를 위한 道路다. 응당 步行者에게 人道를 돌려줘야한다. 나는 어느 老人분이 태연하게 황금로 人道를 오토바이를 탄 채 지나가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계속 주시를 해보니 人道를 잠깐 동안 利用하는 게 아니라, 數 百 미터 以上을 계속 走行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啞然失色했다. 물론 그 동네 人道가 대개 閑散한 탓도 있었겠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한 일이 아니가 싶었다. 各種 配達 오토바이들의 人道 走行은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나는 이 場面만 보고도 大邱의 現實을 切感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宅配 오토바이들의 막가派式 運轉行爲에 歎息했다. 대구는 宅配오토바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一般人들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들의 人道 走行이 問題다.

서울에 비해 相對的으로 老人人口 比率이 높은 大邱는 이래저래 沈滯될 수밖에 없는 運命에 처해있는 것이 事實이다. 老人들에게 覺醒하라고 促求한다고 해서 劃期的으로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老人들 중에서 그래도 ‘깨어있는’ 老人層이 있다면 그래도 可望性이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한때는 知識層에 속해있던 老人들이 발 벗고 나서서 都市 改革化 作業에 一助한다면 成功 可能性이 없지는 않다.

by 럭키 | 2009/11/07 21:13 | daegu

세 자녀 모두 美명문대 보낸 타블로 어머니 김국애 원장

세 자녀 모두 美명문대 보낸 타블로 어머니 김국애 원장

“아이들이 저희에게 준 추억과 기억만으로 빚은 다 받았다고 생각,
공부 때문에 아이를 외롭게 만들지 마세요"

김국애 헤어포엠 원장(62)에게는 꽤 오래전부터 인터뷰 요청을 해오던 차였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타블로의 예의 바르고 영민한 모습에 ‘어머니는 어떤 분일까?’ 하는 개인적 호기심이 반이었고, 타블로를 비롯한 세 자녀 모두 미국 명문대에 보낸 교육 비법 또한 궁금했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장성한 자식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조심스럽다”며 인터뷰를 거절해오던 김 원장을 여름이 가기 전 만날 수 있었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에 앳된 미소, 김 원장은 환갑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 있는 표정과 따뜻한 에너지를 가진 분이었다.

가난했던 부부, 누구보다 확고했던 자식교육에 대한 꿈

“아이 셋을 어떻게 키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럴 때마다 남편이 70%를 했다고 대답해요. 결혼 전부터 남편은 가족과 자식에 대한 완고한 철학이 있었거든요.”

데뷔 때부터 ‘스탠퍼드 대학원 출신의 수재’로 화제가 되었던 가수 타블로. 얼마 전 형과 누나도 각각 미국의 명문 컬럼비아대학원과 코넬대학교를 졸업한 사실이 알려지며 ‘엄친아 가족’으로 다시 화제를 모았다. 어머니 김국애 원장은 45년 동안 미용업에 종사해온 미용인이다. 자식 셋을 모두 미국으로 대학을 보냈을 정도면 부모가 굉장한 재력가일 것이라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들 부부의 시작은 매우 가난했다.

“남편과 저 둘 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 시절엔 누구나 가난했지만, 전쟁고아로 고아원에서 자란 남편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에요. 저 역시 11형제 중 6째로 집안 형편이 풍족하지 못했죠. 그런 환경을 겪어서인지 결혼해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범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꿈처럼 품고 있었어요. 특히 자식을 낳으면 최고의 교육을 시키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죠.”

가난한 전쟁고아와 섬처녀가 만나 그런 꿈을 꾸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세계의 중심이 되는 국제인으로 키우겠다는 남편의 의지는 ‘신성불가침’과 같은 것이었다고 김 원장은 말한다. 목사님의 소개로 서울대 토목과에 재학 중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30만원짜리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이들 부부는 한 걸음 한 걸음 꿈을 키워 나갔다.

“워낙 어렸을 때 힘들게 자란 남편은 고생하는 것에는 겁이 없는 사람이에요. 저 역시 미용 일을 하고 있었고, 둘 다 기술이 있으니 열심히 살면 이루지 못할 게 없었어요. 우리 모두에게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는 걸 남편을 만나고 자식들을 키우며 알게 됐죠.”


1. 세 살 무렵의 타블로
2. 미국으로 떠나기 전 올림픽공원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3. 캐나다에서 3남매
4. 발리 가족 여행
5. 큰아들과 브라운 대학에서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철칙, 고심 끝에 떠난 캐나다행

아이들을 외국에서 교육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꺼낸 것은 남편이었다. 혈연과 지연, 학연에 묶여 있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모순에 아이들이 재능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건설 쪽 일을 하며 일년에 반 이상 해외 출장을 다니며 보아온 선진국의 교육 시스템도 그런 생각에 한몫을 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곳에서 합리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아이들을 외국에서 키웠으면 좋겠다고 남편이 먼저 얘기를 했어요. 미용사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한국에서 미용으로 성공하고 싶었던 전 반대했죠. 남편이 ‘당신이 아무리 크게 성공해도 아이들이 당신 어깨의 별이 되는 것보다 값진 것이겠소’라고 절 설득하더라고요.”

마침 인도네시아로 가게 된 남편이 가족 모두가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고 복잡한 마음에 김 원장은 미용실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당시 패션의 중심지 명동에 미용실을 개업했을 때였다. 남편을 따라가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무엇이 아쉬워 해외에 나가 고생을 하나’라는 반응이었다.

“남편의 철칙 중 하나가 자식들이 어렸을 때 절대적으로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굶어죽지 않는 한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잦은 출장으로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다 더 이상 가족을 외롭게 하지 못하겠다며 함께 인도네시아로 가자고 하더군요. 저도 그동안 무리해서 일하며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고 아버지와 많은 시간 떨어져 있었던 아이들에게 빚을 갚는 의미로 함께 떠나기로 했어요.”

큰아들과 둘째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고, 막내 타블로가 막 태어났을 때였다. 남편의 건강 악화로 2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린 시절 해외에서 보낸 경험은 큰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큰아들의 바람에 온 가족이 다시 한번 짐을 싼 건 1988년 88올림픽 직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큰아이가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인도네시아에 있었을 때 영어를 좀 했는데 영어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었나 봐요. 절대로 혼자는 보낼 수 없다는 남편의 불호령이 떨어졌죠. 당시에는 아이를 혼자 쉽게 유학을 보낼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고 저 역시 엄두를 못 냈어요.”

장남이니만큼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해 자리를 잡은 후에 외국에 나가도 되지 않겠냐는 김 원장의 설득에도 큰 아들은 유학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데이브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가족은 고심 끝에 캐나다로 떠나게 됐다. 이 역시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남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고 남편은 오랫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캐나다에서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어중간한 시기에 유학을 시작해서 큰아들이 고생이 많았어요. 한국인이 거의 없는 사립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며 주말에만 가족을 볼 수 있었으니 많이 외로워했죠. 아이를 외롭게 두지 않기 위해 가족 전체가 캐나다까지 왔는데도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며 저도 많이 울었어요. 그래도 본인의 목표가 있으니까 그 시간을 잘 참고 이겨냈어요.”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나와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국제경제학을 공부하고 월스트리트에서 증권 트레이더로 7년 넘게 일한 큰아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해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까지 모범적인 틀 안에 충실했다. 첫째와 둘째가 힘든 과정을 거친 데 비해 학창 시절을 외국에서 시작한 타블로는 더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다.

6 스탠퍼드대에서 연극 감독을 하던 시절의 타블로
7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엄마와 함께
8 고등학교 때 졸업 최우수상을 받으며
9 Youth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담당했던 타블로
10 스탠퍼드대에서 타블로의 고등학교 은사님과 함께


신중하고 합리적인 첫째와 둘째,
엄마를 닮아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타블로

어렸을 때부터 타블로는 엄마를 잘 도와주는 가정적인 아이였다. 엄마와 함께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해 과자를 구울 때도 한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김 원장이 어린 시절 막내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타블로는 책을 좋아했다.

“큰아들이 대학을 결정할 무렵 아이들을 데리고 스쿨 투어를 떠났어요. 미국 동부와 서부를 돌면서 여러 학교를 둘러봤는데 스탠퍼드대학교 교정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막내에게 ‘장차 네가 올 학교야’라고 얘기해줬죠. 그때 뭘 알았는지 막내도 ‘엄마, 나 이 학교 꼭 올게요’라고 대답했던 게 기억나네요. 교정에서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게 엊그제 같아요.”

김 원장은 둘째 딸 선주씨가 코넬대에 입학했을 때 “아들을 코넬대에 보내려고 유치원부터 준비했다”는 어느 미국인 학부형이 했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코넬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둘째 딸은 국내 법학대학원을 졸업 후 미국 로스쿨을 거치지 않고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 변호사 시험 응시자격은 원칙적으로 미국변호사시험위원회(ABA: American Bar Association)가 인정하는 로스쿨(Law School: 법학대학원) 졸업자와 주별로 ABA 인증 교과과정을 운영하는 로스쿨 졸업생들에게 주어진다. 미국 로스쿨을 졸업하지 않고 곧바로 미국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것은 영국과 독일의 일부 대학 출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최초였다. 변호사 시험 합격 후 선주씨는 외교통상부에서 1년, 미연방법원에서 1년 동안 일하다 지금은 미국 로펌 ‘폴 헤이스팅스’에서 일하고 있다. 미국에서 치과의사와 결혼해 조만간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딸을 위해 김 원장은 얼마 전 태어날 아기 이름을 지어 보내줬다. 심성이 착해 언제나 엄마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던 딸이 엄마가 된다고 생각하니 대견스럽고 가슴이 뭉클하다.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 미술, 음악에 소질이 많은 타블로까지, 공부 잘하고 다재다능한 아이들을 키우며 엄마 아빠가 얼마나 신났을까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많을 만하다. 하지만 항상 좋은 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맨 처음 이민 갔을 때 남편이 캐나다에서 건축업을 하며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본인이 원하기는 했지만 엄격한 규율의 기숙사 생활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낸 큰아들을 보며 울기도 많이 울고, 오빠 때문에 이민을 와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둘째 딸도 맘고생이 많았죠. 형과 누나에 비해 자유로웠던 타블로는 또 자유로운 만큼 자기 안에서 생각과 갈등이 많았어요.”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타블로지만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 탓에 외로움도 많았고 혼란의 시기도 거쳐왔다. 타블로는 얼마 전 스탠퍼드대 재학 당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지에서 쓴 글을 엮어 만든 소설집 「당신의 조각들」을 펴내며 “글쓰기는 혼란스럽던 현실에 대한 탈출구였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큰아들과 둘째 딸은 아빠 성격을 많이 닮았어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신중해요. 남편이 얼마나 신중하냐 하면 제가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건너지 않을 사람’이라고 할 정도예요. 막내아들은 저를 많이 닮아서 다혈질에 감수성이 풍부하고요.”

 

자식교육을 위해 이민까지 가서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그래도 지금 각자의 길에서 잘 헤쳐 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고 감사하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심어준 아름답고 값진 추억들, 함께 행복했던 시간만으로 충분히 그 빚을 받았다고 김 원장은 생각한다.아버지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써온 글,지난 가을 「창조문예」에 등단종종 방송에서 밝혔듯이 타블로가 가수 데뷔 당시 부부의 반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아들이 법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던 남편의 실망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미용실을 하며 누구보다 연예인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던 김 원장 역시 아들의 결정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

“발만 삐끗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게 연예계”라는 말로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도 했지만 아들이 진심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저희도 자식들에게 바라는 게 있었죠. 왜 없었겠어요. 완고한 남편에 비해 저는 굉장히 자유로운 여자였어요. 제 아버지가 저에게 자유로운 삶을 살길 원하셨기에 저 역시 타블로가 가진 기질을 200% 표현하며 살길 바랐어요.”

전남의 작은 섬 거금도에서 태어난 김 원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으로 그 누구보다 풍요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문학청년이셨던 아버지가 위로 오빠 다섯을 두고 11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녀를 위해 지어주신 시는 그녀 인생의 첫 번째 선물이었다.

“국화 국(菊)자에 사랑 애(愛)자의 이름과 함께 ‘일백 꽃이 필 때 너는 피지 않다가 네가 만약 피려 하니 일만 꽃이 다 죽더라’라는 시를 지어주셨어요. 제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예요.”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항상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딸이 문학가가 되기 원하셨던 아버지 역시 그녀가 미용 일을 시작할 때 반대를 많이 하셨다.

“웬만큼 반대하셨던 게 아니라 정말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문학은 정말 춥고 배고픈 일이었거든요. 아버지께서 항상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비록 가난하고 힘들지만 넌 귀한 사람이다’예요. 그 처절한 가난에서 아버지가 제게 주셨던 사랑은 정말 차고 넘치는 것이었죠. 그렇게 반대하시던 미용 일을 시작하고 아버지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틈틈이 글을 써왔어요. 미용은 물로 씻고 나면 지워지고 없어지지만 글은 영원히 남는 거잖아요.”

그렇게 틈틈이 쓴 글 중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과 ‘아름다운 동반자’라는 작품으로 지난 가을 「창조문예」에 등단까지 했다. 타블로가 이런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알기에 10가지 중 9가지 남편 편을 들던 그녀는 아들 편에 서서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한테 ‘여보, 이런 명문대학 나와서 설마 굶어죽겠어요’라고 했어요. 제 아버지도 저에게 꼭 돈 잘 벌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거든요. 공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일을 하더라도 경험은 다 재산이에요.”

여리고 눈물이 많아 과연 이 아이가 연예인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위기를 만났을 땐 누구보다 강한 아들이다. 무엇보다 영혼이 깊고 따뜻한 막내아들을 믿기에 아들이 하는 일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는 그녀는 타블로와 스탠퍼드대학원 졸업식 때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타블로가 대학원 졸업할 때 남편이 몸이 아파서 저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갔어요. 그때 워낙 급하게 가느라 한국 돈 10만원 정도와 공항에서 신용카드를 만들어 갔는데 공항에 도착해보니 카드가 안 되는 거예요. 10불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 졸업식을 치르나 눈앞이 막막했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타블로가 제 어깨를 툭툭 치더니 ‘엄마, 지금부터 돈 없이 졸업식 치르고 5일 동안 살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두 사람은 일단 중국집에 가서 제일 싼 음식을 시켜 둘이 나눠 먹었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서 오픈된 무료 미술관을 찾았고 서점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봤다. 졸업식 때 꽃은 교회에 장식돼 있던 꽃을 잠시 빌렸고 엄마가 평소 존경하던 마틴루터 킹을 자주 인용해왔던 것을 생각해 타블로가 마틴루터 킹 동상 앞에 함께 가 사진도 찍어줬다.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타블로와의 추억이다.

“3년 반 동안 미국에 있던 아이의 짐이 바지 하나, 양말 두 켤레, 책 한 상자였어요. 졸업식 때 입었던 석사복을 넣을 가방이 없어서 공항에서 ‘가방 하나를 사자’고 했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요.”

타블로는 ‘엄마가 나의 미래 와이프상’이라며 엄마 같은 아내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가슴을 설레게 하기도 했다. “엄마는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편에 서 있었고 항상 아버지와 함께해줬어요”라는 말도 덧붙여서 말이다.

“제 자식이지만 제가 배울 게 많아요. 그렇게 듬직하고 따뜻할 수가 없어요. 그 누구보다 아들과 아들의 선택을 믿습니다.”

준비 없는 조기유학은 아이 가슴에 불을 품게 하는 것

자식 셋을 모두 미국에서 졸업시킨 학부모로서 조기유학을 바라보는 김 원장의 시각은 매우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아이가 어린 시절을 가족과 떨어져 보낸다는 것이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요즘 어머니들은 정말 용감한 것 같아요. 요즘에야 예전만큼 해외여행이나 유학이 힘든 시절이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를 부모 곁에서 떠나보내게 되면 아이가 가슴에 불을 품고 사는 것과 다름없어요. 아이들에게 부모가 제일 필요한 때가 사춘기 시절이에요. 그때는 자식이 아무리 부모 애를 먹여도 부모와 자식은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부모 욕심으로 아이들의 환경과 미래를 설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부가 함께 있어도 열심히 노력해야 가정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저도 남편의 일 때문에 자주 떨어져 있어봤기에 잘 아는데 엄마가 아이들 데리고 조기유학을 떠나거나 아이 혼자 유학을 보내는 것은 정말 말리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영어 잘하고 크게 성공해도 가족이 주는 안정과 중심을 잃어버리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한국에서 누리던 물질적인 풍요를 다 접고 아이의 뜻에 따라 미국으로 떠난 건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부부의 신념 때문이었어요.”

조기유학의 성공률은 30% 정도라고 본다. 나머지 70%는 실패, 그것도 아이와 가족에게 아주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크다는 게 경험자로서 김 원장의 조언이다. 낯선 환경과 인종차별에 시달려야 했던 아이들의 유학생활에서 자신과 남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유혹을 순진하게 받아들여요. 천장에서 기름이 떨어져도 그것 때문에 불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 채 아름답게만 보는 게 아이들의 눈이에요.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아이를 공부시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정말 가정의 철학이 확고하게 뒷받침되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 믿음이 있다면 걱정할 것 없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한국에서 성적이 떨어지거나 해외에 가면 무언가 더 좋은 것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유학을 가는 건 더더욱 위험하다. 아이를 유학 보냈을 때 드는 경제적·심리적 비용과 부담, 아이가 느낄 외로움까지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치밀하게 계산한 후에 그 노력을 한국에서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외국에 보내려면 3~5년은 철저히 준비하고 실질적인 준비 외에 아이가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주관과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혼자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줄기차게 연락하고 편지를 쓰세요. 저희도 큰아들이 기숙사에 있을 때 주말마다 데리러 갔고 격려차 자주 얼굴을 보였어요. 아이가 학교에 다녀왔을 때 엄마가 금방 와서 편지를 써놓고 간 것처럼 해야 아이가 외로워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어요. 타국에서 혼자 느끼는 외로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아이에게서 가족과 함께할 추억을 빼앗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녀라고 왜 자식들에게 서운한 점이 없겠는가. 훌륭하게 자란 세 아이들이 있지만 지난날의 희생과 아픔을 생각하면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준 추억과 기억들, 그리고 아이들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했던 시간들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나머지 삶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남편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살고 싶은 마음이다.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에서 압구정동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김국애의 헤어포엠’은 지금 공사가 한창이다. 페인트 대신 산소가 풍부한 점토와 백토를 이용해 친환경적 공간으로 새 단장을 하며 그녀 역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란다. 얼마 전에는 직원들과 함께 고향 거금도에서 3일 동안 미용봉사도 하고 돌아왔다. 자폐아 가족들과 수련회에 참가하며 지금까지 자신이 받은 행운과 축복을 이제 다른 이들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혹자는 자식들을 위해 그녀의 삶을 희생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충실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삶을 일군 아름다운 어머니다.(2009.9 레이디경향)

by 럭키 | 2009/11/03 21:46 | studing

어느 글

"엘리트가 亡해가는 世上…大衆 '暴民시대' 왔나"

政治人이 더 優秀한가, 大衆이 더 優秀한가? 李承晩 朴正熙 大統領 때는 指導者的 政治人이 越等히 더 優秀했다. 그러나 1987年의 民主化 以後로는 大統領이란 사람들은 大衆에 迎合하는 아첨꾼 水準으로 轉落했다. 大衆의 눈치를 보고, 大衆의 人氣를 意識하고, 大衆이 아우성치면 꼬리를 사타구니에 팍 쳐 박는 겁쟁이들로 萎縮되었다. 이것을 눈치 챈 俗衆들은 더욱 더 氣勝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暴民의 時代가 온 것이다. 龍山事態 때 火焰甁 던지고 시너 뿌리고 새총 쏘고 警察官 불태워 죽인 쪽 앞에 나아가 一國의 國務總理란 사람이 “잘못 했다”고 席藁待罪 하는 世上이 되었다. 檢事들, 判事들은 더, 이런 世態에 대해 그 잘난 ‘進步的’ 잣대를 適用해 利敵團體 構成員들을 ‘南北對話와 統一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執行猶豫로 釋放하는 世上이기도 하다. 利敵團體와 ‘統一을 위해서’가 도대체 어떻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인가? 利敵團體면 釋放을 하지 말아야 하고, ‘統一을 위해서’라면 아예 拘束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2000年代의 韓國은 한 마디로 엘리트가 大衆에 投降한 시대다. 體制야 여하튼, 精神狀況은 완전히 無政府主義, 民衆 直接地排, 꼼뮨(commune)主義, 中國 文化革命 期間의 ‘勞動者-農民-兵士 委員會’의 暴力 地排 그것이다. 法治主義, 議會主義, 技術 官僚(expertise), 知識 엘리트, 先輩, 아버지, 職場上司의 리더십을 깡그리 무시하는 무뢰배 俗衆들의 낫과 곡괭이 反亂-이게 우리네 現實이다.  이 暴民들의 反亂에 엘리트는 물론, 그 리더라 할 一國의 大統領들도 屈服했다. 大統領들은 이미 俗衆들의 捕虜,로 잡힌지 오래다. 盧泰愚, 金泳三은 暴民의 버르장머리를 북돋우어 주었고, 金大中 盧武鉉은 아예 거리의 뗑깡 暴民들에게 權力을 내주었다.  李明博 大統領은 그처럼 莫强한 權力으로 浮上한 暴民들이 어쩌다가 슬쩍 눈알을 부라리기만 해도 全身을 사시나무처럼 떠는 겁쟁이 大統領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大統領에 대해 朴槿惠 같은 ‘有力한 次期’가 例事로, “大統領? 너 뭐야?” 하고 대드는 世上, 亂動者들이 “法官? 너 뭐야?” 하고 判決을 是非하는 世上, ”아버지? 當身 뭔데 감히 盧武鉉을 욕하는 거야?“ “警察? 너 뭔데 우리 아기 자는데 호루라기 부는 거야?” 하고 惹鬧하는 개판 世上이 되었다. 大統領보다는 暴民들의 힘과 머리와 心臟이 월등히 더 쎈 世上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亡하는 거지. 그리고 이런 世上이 當然히 亡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異狀한 일이다 이런 世上은 일단 亡하든가, 아니면 亡하기 3分 前까지는 가야 한다. 그런 다음 한 번 정말 뜨거운 맛을 보고 난 다음 그 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2009.11.3 柳根一. 뉴데일리)


國民이 政府에 대해 批判하고 抵抗하는 理由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 나라가 지나온 그간의 歷史를 살펴보면, 政權을 잡은 대부분의 權力者들은 물론이거니와, 政治에 關與하거나 法을 執行하고 國家를 이끌어가는, 龜鑑이 되어야 마땅한 소위 엘리트, 社會指導層 人士라고 自負하는 者들이 하는 行態는, 그들은 항상 그러했듯 입으로는 淸廉潔白을 외치고 國民을 위해 머슴이 되겠다고 말하면서도, 뒤로는 갖은 不正腐敗的인 行爲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子子孫孫 富貴榮華를 누리면서 온갖 私利私慾을 채우는데 汨沒했다. 새 政權이 들어설 때마다 처음의 입에 발린 소위 對國民 約束과는 달리 하나같이 墮落의 極한 模襲을 보여 왔던 그들이 아니었나. 그럼에도 不久하고 國民들에게는 政府를 믿고 따르고 法을 지키라고 외친다 하여 그것을 마땅히 여기고 순순히 따를 사람은 이 나라 아니, 全世界 어디에도 있을 리 없다. 率先하여 模範을 보이고 淸廉을 實踐하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히려 몇 술더 떠 法과 道德性을 妄覺한 行爲를 밥 먹듯 하니 그 어느 누가 이를 따르고 認定하려할 것인가 말이다. 더 기가 막힐 일은, 一部 政治 權力者들은 한술 더 떠 ‘惡한 法’도 나라가 정한 法이니 法을 지키라는 論理를 펴는 것이다. 이글을 쓴 自稱 똑똑한 柳根一씨는 도대체 왜 國民들이 나라님을 우습게 알고, 法을 어기고 事事件件 나라가 하는 일에 트집을 잡고 생떼를 피는 理由가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되묻고 싶다.

獨裁에 抗拒, 民主化運動으로 投獄되거나 言論을 통해 한때는 尊敬을 받던 人事들이나 論客들이 老衰하여 隱退를 하고 한동한 뜸한가 했더니 각종 言論媒體에 나타나 이상한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金東吉, 金芝河가 그러하더니 朝鮮日報 論說委員으로 筆名을 날리던 柳根一이 그러했다. 그들이 한때는 그래도 자신의 一身을 圖謀하지 않고 監獄도 不辭하고 勇敢하게 쓴 소리를 내뱉고 一筆揮之하던 功勞는 尊敬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그쯤 했으면 尊敬을 받으며 草野에 묻힐 법도 하건만,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는 世上이 다시 어지러워지고 있다고 생각됐는지는 몰라도 역겨운 老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老醜. 그것은 무섭고 또 醜雜한 것이다, 韓國처럼 儒敎, 敬老思想이 두텁게 내리깔린 社會에선 더욱 그러하다. 先輩노릇, 어른노릇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住僧처럼 조용히 隱遁하지 못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村구석에 묻혀 孤獨하게 보내는 生活을 결코 견뎌내지 못하고 기어코 다시 나타나 한 소리 해야 직성이 풀린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 가타부타 못한다. 제지하지 못한다. 그가  그래도 한땐  往年에 잘 나가던,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경로우대 사회이고, 나이 많은 게 자랑이고 또 벼슬이다. 민증 까보여야 塔骨公園서 제법 行世 꽤나 할 수 있는 나라다.

제발 좀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 世上事 돌아가는 일 그냥 보고 넘겼으면 좋겠다. 제아무리 世上 일이 궁금하고, 따지고 싶어도 그러려니하고 넘겨라. 그게 삶의 知慧다. 당신이 關與하고, 참견하고, 쓴소리 해야 世上이 조금은 변할 것 같아도, 미안하지만 世上은 그대들이 나선다 해서 눈하나 깜짝않고 절대 바뀌지 않는다. 大韓民國 政府竪立 이후 줄기차게 그래왔다. 黙黙히 自身의 生을 되돌아보고 自省하고 앉아있는 편이 그나마 남아있던 그대들이 往年의 누린 알량한 名譽라도 지킬 수 있는 方法이다.

한때는 이 나라를 주름잡던 人物들은 왜 하나같이 普通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가? 왜 입 닥치고, 귀 막고, 눈 감고 살지 못하는 것인가? 답답해서 못 살겠고 俗世에라도 나타나고 싶다면 하다못해 奉仕活動이라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모양새가 차라리 좋다. 이 나라 大統領을 거쳐 간 人物치고 그런 人間은 하나도 없다. 무슨 무슨 財團이니, 硏究所니 하여 국민의 血稅를 쏟아 붓고 그들을 名譽總裁니 硏究所長이니 하는 쓸데없는 禮遇라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禮遇가 다 뭔가. 韓國의 最高位職 자리에 앉아 號令해봤으면 이제는 平凡한 庶民生活로 돌아갈 때가 됐고 그런 모습을 보는 國民들은 拍手를 치며 진정 尊敬해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남은 餘生을 사는 것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모습을 이제는 보고 싶고 그럴 때도 됐다. 앞으로는 待接받고 禮遇 받고 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부터 模範을 보여줘야 한다. 韓國社會에 만연한 그 썩을 前官禮遇라든가, 品位維持라든가 하는 舊態를 깡그리 벗어 내던지지 않으면 이 나라의 발전은 遼遠하다.

by 럭키 | 2009/11/03 14:46 | notes

'이다도시'의 美

by 럭키 | 2009/11/02 22:07 | portrait

80년대 매일신문 인근의 식당들

2009.11.2(월)의 단상

1985년때이던가, 한 5년 가까이 계산동 매일신문사에서 일하던 시절. 점심으로 자주 애용하던 신문사 인근의 맛있던 단골집들이 생각났다. 그 중 기억에 남을 만한 집들은 대략 너 댓집 쯤 되는 것 같다. 나는 평소 탕이나, 장자가 끝에 붙는 이름의 음식을 즐겼는데, 예컨데 추어탕, 아구탕, 곰탕, 갈비탕, 매운탕, 육개장 같은 것들이다. 반면 나는 평소 기름지고 느끼한 중국음식을 별로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일신문사 시절 동료와 어울려다녔던 인근 중국집은 내게 진정한 자장면과 잡채밥의 참맛을 알게 해준 은인이었다 해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생각지도 않은 객지생활을 20여년 하면서 서울에도 나와 궁합이 맞는 꽤 괜찮은 집들이 여럿 있었지만 여전히 대구시절 즐겨찾던 맛집들의 향수는 지금도 잊을수 없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거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느 초여름날 오후 4시, 석간신문인 탓으로 훤한 대낮에 퇴근해봐야 갈 곳도 마땅찮았던 시절, 경리과 노처녀 서무에게 읍소하다시피 가불한 몇푼의 월급으로 염매시장 한귀퉁이 대폿집서 동료와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기억에 남는 곳들 중 맨 먼저 꼽으라면, 점심때 가장 자주 다녔던 음식점들 중 하나였는데 상호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매일신문사 주차장과 바로 인접해있는 추어탕집(A)이었다. 이 식당은 20년도 훨씬 넘은 지금도 메뉴를  달리하여 여전히 영업 중이었는데, 주인이 옛날 그대로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집은 늘 전날 과음으로 숙취가 있던 날이면 어김없이 점심시간이 지난 한 2시경 쯤 들리곤 했는데, 그때가 한가하고 혼자 식사하기 좋은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이 집의 추어탕은 내가 먹어본 추어탕집들 중 국물이 가장 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식당 주인 아저씨의 말을 빌면 일종의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싼 미꾸라지를 많이 쓸 수도 없거니와 미꾸라지를 많이 넣어끓인다 해도 진한 국물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으니 미꾸라지를 갈아 넣은 물에다 소뼈를 푹 고운 물을 섞은 뒤 곱창과 우거지 등 야채를 넣어 푹 끓인 게 진한 국물의 비결이라고 했다.(공개하는 걸로 봐선 '비법'은 아니었던 듯?)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바로 추어탕과 함께 나오는 반찬이다. 보통 추어탕 집에 가면 나오는 반찬이라고 해봐야 김치 아니면 간단한 밑반찬 한두가지다. 대개는 양념된 배추김치나, 백김치 같은 게 나오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도 싱싱한 생배추를 썰어서 한접시 내온다. 알싸한 풋고추도 몇 개 포함해서다. 속이 꽉 찬 샛노란 배추를 된장에 찍어 추어탕과 함께 먹는 맛이 이 집의 추어탕 맛을 배가 시키는 것이다.

다음엔 매일신문 맞은편 신명여고(SM) 정문 쪽 바로 왼편엔 오래 된 건물이 하나 서있었는데, 일년내내 담쟁이로 뒤덮인 건물은 단 한 번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지만 기독교 관련 서적을 파는 서점이 아니었나 싶다. 인터넷 지도를 보니 '보문기독서적'으로 되어있다. 지금껏 그 건물이 남아 있을리 없는데 신기한 일이다. 어쨌든 그 고풍스러운 건물이 서있는 길 쪽으로 해서 왼편 안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다 보면 대개 낡고 오래된 주택이나 명목을 알 수 없는 몇 개의 가게들이 을씨년스럽게 들어서 있는데, 지금의 동산맨션 바로 앞 외진 골목길 쯤이라고 보면 된다. 거기에 일주일이면 한 두번 들리던 선지국집(B)이 있었다. 딱히 선지해장국이라고 못 박기도 좀 그렇지만. 기억을 되살려보면, 된장과 선지, 그리고 시래기인지, 우거지인지를 넣은 국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까지는 보통 일반 식당들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집이 특이했던 건 함께 내오는 '된장에 박은 고추'다. 국과 함께 접시에 담아오는 된장과 함께 푹 숙성된 큼지막한 고추는 그것을 입에 넣고 한 웅큼 씹는 동시에 입속에서 터져 나오는 잘 숙성된 고추의 육질과 알맹이들이 어우러지는 기가 막힌 고소함과 기분 좋은 짭짤함이 온 입안 전체로 퍼져 나오는 느낌이란 가히 환상 그 자체였다. 나는 이 집의 '된장박은 고추' 맛으로 인해 고추 마니아가 될 뻔 하기도 했다. 그 뿐인가, 고추가 나올 때 된장도 함께 버무려져 나오는데 아마도 이 집 묵은 된장독에서 고추를 내올때 된장도 함께 따라 나온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런데 이 된장 맛이 또 한 '맛' 한다는 사실이다. 이 집 국의 간을 맞추는 것은 소금이나 간장이 아니라, 바로 된장이다. 주인아저씨 모습이 희미하게 기억이 나는데, 큰 덩치에 50~60대 연세의 후덕해 뵈는 주인아저씨는 좁은 식당의 테이블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처음 와서 약간 머뭇거리는 손님에겐 예외없이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국이 나오면 맨 먼저 고추와 함께 나오는 된장을 숟가락으로 떠서 국물에 넣고 푼 다음, 간을 맞춰본 뒤 먹으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 맛이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의 선지해장국처럼 붉은 기름이 뜨는 매콤하고 다소 느끼한 맛이 아니라, 흡사 시래기 된장국 같이 담백하고 시원한 맛 같았다. 거기에다 큼지막한 선지가 국에 들어있으니 선지국 맛이 나면서도 느끼하거나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지금의 따로국밥 맛이나 육개장 맛과는 전혀 다른 맛이란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농익은 된장이 국 속에 녹아든  맛이라 요즘 대구의 각종 탕 맛에 길들여진 혓바닥으론 이 집 음식맛에 대해 구체화하기란 쉽지 않다. 그간 삼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집사람에게 내가 당시 먹어본 이 집의 국 맛을 설명하며 재현해 볼 것을 권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집사람도 내가 기억을 더듬어 얘기했던 나름대로의 레시피에서 뭔가 아리송함을 느낀 것 같다.

다음엔 약전골목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 안에 있던 매일식당(C)이다. 지금도 이 식당은 주인장이 그대로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꿋꿋이 살아남아있다. 이 집의 비빔밥은 양적으로나 맛으로나, 가격 면에서 좋았던 집으로 생각이 난다. 그 다음으로는, 방금 말한 이 골목 끝까지 걸어가면 왼편으로 2층건물인가에 지하다방이 하나 나온다.(은밀한 밀담을 나눌때 요긴하게 이용됐던 다방이다) 그 다방 오른편으로 돌면 바로 나오는 식당이 있었는데, 역시 상호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집의 가정식백반도 꽤 괜찮았다.

다음엔 중국음식점인데, 매일신문사 건물 현관 앞 계단을 내려와, 계산성당 정문 앞을 지나서 성당 문화관 1층 계산서원 바로 옆에 있던 '장춘반점'((D)상호가 확실치 않다)이 그 집이다. 이 반점 주인 아주머니(화교)는 나를 포함한 매일신문기자들이 대개 낮12시쯤에서 '빈 방 있어요?' 하고 물을때마다  한번도 무표정한 모습을 보지 못했고 늘 웃는 낯으로 대했다. 그 집의 음식이 대개 맛이 있었지만, 갓 볶아낸 뜨끈뜨끈한 자장면의 맛은 일품이었다. 점심시간에 주로 이 집 2호실이나 3호실 방에서 문을 닫아두고 식사 전후 잠시 고스톱을 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오수에 잠기는 맛이 꽤 괜찮았다. 워낙 단골이다보니 주인아주머니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곤 했다.
나는 이 집에서 가끔 아침을 거르거나 출출한 날엔 잡채밥을 시켜먹곤 했는데, 맛도 맛이지만 저녁때까지 든든해서 좋았다.

다음엔 덕산파출소쪽 덕산목욕탕이 있던 길으로 들어서서 조금난 걸어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은 가게, 주택 옆으로 간판도 제대로 붙어있지않은 아주 조악해보이는 단층 집이 하나있는데 그 집이 바로 아구탕집(E)이었다. 좁고 허술해뵈지만, 커다란 양재기에 한껏 푸짐하게 넣고 끓인 콩나물과 양껏 먹을수있는 아구탕 국물 등 넉넉한 인심이 유별난 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아구탕이란게 원래 그러하듯, 건데기라고 해봐야 별게 없지만 콩나물과 아귀에서 우러난 시원하고 매콤한 국물맛은 일품이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먹던 이 집 아구탕 국물맛은 이후 서울에 올가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던 맛이었다.

by 럭키 | 2009/11/02 15:02 | daegu | 트랙백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